강신주 철학vs철학

 

진실에서 방편으로, 혹은 용기에서 애정으로

- 구조주의는 실존주의가 후기구조주의로 귀결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교량과 같은 것이었다.

- 20세기 프랑스 철학계의 세 단계를 자유와 구조라는 개념으로 요약해보자.

  •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 인간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신념에 따라 그 자유를 실천했던 시절이 있었다.
  • 레비-스트로스와 푸코 등으로 유명한 구조주의 - 자유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담벼락에 부딪히게 된다. 이 담벼락이 인간을 감금하는 세밀한 구조다.
  • 세 번째 단계는 데리다나 들뢰즈로 상징되는 후기구조주의 - 이 구조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우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구조를 넘어서는 자유'를 모색했다.

 

[푸코의 사상]

- 푸코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파르헤지아'이다. (파르헤지아: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 억압적 구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것 만이 아닌 그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기 대문이다.

- 압력과 불이익에 맞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파르헤지아의 주체에게 가장 요청되는 덕목은 바로 '용기'다.

- 그리고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구조에서 훈육된 주체가 아닌,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의 탄생이다.

- 하지만 진실을 말함으로써 온갖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이런 여린 주체만으로 세계와 구조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진실을 타인과 공유하며 강고한 연대를 만드는 것이다.

- 진실의 연대를 구성하려면,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타인에게 전달함으로써 타인도 나와 같이 진리를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진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진실을 전달하는 방법]

 

 

그람시: "대중과 함께 움직이고 인도하라!"

1)

- 자본은 동일한 인간을 노동자와 소비자로 분열시켜 잉여가치를 얻는다.

- 국가의 재분배는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 수탈과 재분배

-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는 국가가 가장 많은 세원을 제공하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게 된다는 점이다.

 

2)

-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와 자본가의 야합에 대해 폭로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조롱했다.

- 결국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진실이 항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그람시 1

- 어째서 대중은 지식인을 적으로 생각하고, 국가와 자본가를 친구로 생각하는가? 진실은 왜 대다수에게 전달되지 않는가? 에 대해 고민했다.

- 그람시는 진리의 발견보다 진리의 확산 혹은 진리의 사회화가 더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확산되지 않은 진리는 공허하고 진리가 없이 통용되는 지식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4) 그람시 2

- 혼돈스러운 상식을 반성해서 존재하는 세계를 정합적으로 생각할 때 바로 양식이 등장한다. 이처럼 상식을 양식으로 성숙시키는 것, 그람시는 이것이 바로 철학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5) 그람시 3 - 인식, 이해, 느낌

- 그람시는 지성인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왜 일어나는지 고민했다.

- 느낌: '나'가 개입되어 주관적인 ㅅ어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정규직은 불안한 신분이라는 느낌)

- 인식: '나'라는 주관을 괄호 안에 넣어두고 순전히 구조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자본과 국가의 책략이라는 인식)

- 이해: 느낌과 인식 사이에 있는 이해는 주관적인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비정규직은 여러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서 안정성이 없다는 이해)

 

6) 그람시 4

- 느낌에서 이해로, 그리고 이해에서 인식으로 이를 때, 대중 누구나 지성인 될 수 있다.

- 대중의 삶을 산 밑의 척박한 삶에 비유한다면 인식에 이른 지성인의 삶은 산 정상의 삶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 산 밑의 느낌의 세계, 산 중턱의 이해의 세계, 산 정상의 인식의 세계.

- 산 정상에 고독하게 살기 위해 산에 오른 것이 아니다. 산 밑의 삶을 조망했다면 다시 내려가 대중을 산 정상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성인은 대중성을, 그리고 대중은 지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벤야민: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깨워라!"

-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특정 관점"이 가능해야 비판 활동, 혹은 철학이 가능한 법이다.

- 그렇지만 벤야민이 보았을 때, 우리 시대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는 그런 초월적인 전망이나 조망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 광고와 영화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에 젖어 있는, 그래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대중에게 억압과 착취의 진실을 그리고 느낌과 이해를 깨울 수는 없었다. 

- 하여 벤야민은 광고와 영화의 강력한 힘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몽타주와 클로즈업 등 편집의 힘으로 필요한 사물에게 빛을 부여하는 주목과 부각의 방법으로 말이다.

- 벤야민은 영화처럼 글을 쓰려고 했다. "영화의 스크린에서 차가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 쪽으로 흔들리며 질주해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까지 들이미는" 것처럼, 벤야민은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지적인 글보다는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당혹감, 냉소주의의 해독제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1)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연대와 사랑의 길로 나아가면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면, 우리는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을 테니 말이다.

2) 벤야민이 적당한 거리를 두는 비판을 냉소주의의 징후로 비판했다면 

3) 슬로터다이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적당한 가까움을 유지하는 비판이 가능함을 이야기했다.

 

단어

사변적: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

관조적: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

정합: 가지런히 꼭 맞음. 이론의 내부에 모순이 없음.

몽타주: 영화나 사진 편집 구성의 한 방법. 따로따로 촬영한 화면을 적절하게 떼어 붙여서 하나의 긴밀하고도 새로운 장면이나 내용으로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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