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vs철학]
1.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이의 은밀한 동거
-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 국민은 총통의 결정이 곧 자신들의 결정인 것처럼 믿고 생각했다.
- 피통치자는 자신이 엄연한 판단의 주체이자 책임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발적 복종에서 자발에 방점을 찍어 복종의 진실을 가리려는 정신승리의 반응이다.
- 이런 나치즘의 논리에 20세기 최대의 존재론자 하이데거가 연루되어 있다.
[하이데거]
- 존재자를 인식하려면, 먼저 존재가 우리 자신과 존재자를 밝혀주어야 한다.
- 예를 들면 어두운 밤이라 하여도 형광등이 있음으로 해서 집안의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형광등의 불빛이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에 해당한다.
- 그리고 태양이나 형광등처럼 존재를 드러내는 탁월한 존재자가 있다. 히틀러와 같은.
- 히틀러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유대인들은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부하는데 집중한다.
- 그중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가 있었다.
2. 아도르노: "이성이 추구하는 동일성이 배제와 억압을 낳는다."
- 아우슈비츠를 낳은 것은 광기나 비정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 참혹한 학살을 일으켰던 주범은 서양철학이 자랑하던 이성 혹은 합리성이었다.
-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순수한 동일성, 혹은 본질을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해왔다.
- 개념으로 무엇인가를 포착하기 위해서 이성은 개체들이 가진 복잡성과 차이는 제거하고 획일화해야만 한다.
-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욕망에서 아도르노는 마침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 동일성에 대한 욕망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이런 순수성을 더럽히는 차이로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제거하려는 나치의 편집증적 욕망으로 실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동일성 논리에 따르면]
- 유대인 A B C D 네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이들은 그들이 가진 단독성으로 사유되지 않는다. (단독성 = 교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각 개체들의 개체성을 의미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 그들은 유대인 1, 유대인 2, 유대인 3, 유대인 4라는 특수성으로만 사유될 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란 개념은 일반성을 상징한다.)
- 이 네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일반성에 의해 포획된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개념의 동일성 혹은 이성의 순수성이 아우슈비츠를 낳았다면 이러한 비극을 막는 방법은 개체들을 다른 것으로 교환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이성의 논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 아도르노가 제안한 변증법은 종합이 아니라, 종합되지 않은 모순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있다.
- 아도르노는 정과 반만 남기고 합은 거부하려 한다.
3. 아렌트: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아렌트가 말하는 철저한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 그녀에게 사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한계성] - 작가 생각
- 세계화되어가는 자본의 운동 속에서 쓸모없는 실존을 숙고하려는 아도르노의 노력과 사유를 의무로 수행하라는 아렌트의 충고는 무기력하다.
- 전체주의를 막는 방법은 주체의 시선이나 태도의 변화로만 가능한 것이 아닌 전체주의적 비극을 조장하는 사회구조나 체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려는 작업도 수반되어야만 한다.
- 그리고 그 새로운 사회 체계는 시몬 베유가 이야기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을 붕괴된 사회인 것이다.
- 상급자도 육체노동에 종사하게 된다면, 그 체계는 거대해질 수 없는 법이며, 인간 개체를 하나의 작은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가와 같은 거대 체계들은 발 붙일 수 없을 것이다.
4. 축제의 열기, 그 이면의 싸늘한 논리
-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아쉬운 점은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심각한 맹점을 우회해버렸다는 데 있다. 그들은 각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기만 하고 구조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 대도시는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라는 태도 정서적인 태도보다는 지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 이러한 파편화, 부품화 된 개인들은 자본과 국가 입장에서 유리했었다. (다수가 연합한다면 소수의 지배자들은 쉽게 무너질 수 있었으므로)
-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자신들에게는 관심을 가지길 원하고 정치에는 무관심을 원하는 이중적 태도를 원하게 된다.
- 그러기 위해서 무관심을 조장하는 시간과 관심을 유인하는 시간으로 이분화하기로 한다. 선거를 정치적 축제로 묶는 것이다.
- 이러한 축제에 대항하는 대항적 축제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저항하는 축제일 것이다.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거부하고 직접민주주의를 꿈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