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vs철학
1. 욕망이란 개념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욕망]
- 욕망은 식욕과 같이 생명체의 이기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 또는 성욕과 같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욕구로 간주돼왔다.
- 이런 이유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역시 욕망이란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되었다.
- 동양의 맹자 또한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강조했다.
- 이렇게 욕망과 육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빈약한 생산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18,19세기 이후 서양에서 욕망을 긍정적으로 응시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다.
- 심지어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20세기 후반 서양 사회가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욕망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로까지 격상한다. 물론 이것은 상품을 판매하려는 산업자본의 무의식적인 동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 산업자본이 개인적 욕망과 그 충족의 자유를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2. 라캉: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학은 욕망에 대한 명확한 이론화에 성공한다.
- 랑캉의 사유에 코제브의 욕망 이론은 강한 영향을 미쳤다.
[코제브]
- 코제브는 인간의 욕망이 기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일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나의 욕망에는 항상 타자의 욕망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는 인간의 욕망을 타자에 대한 것과, 대상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 - 타자에 대한 욕망: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이다.
- - 대상에 대한 욕망: 돈, 권력, 미모, 명예와 같은 대상들을 욕망하는 이유는 타자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 결국 인간의 모든 욕망에는 타자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욕망에 대한 코제브의 근본적인 통찰이다.
[코제브의 한계 그리고 라캉]
- 주체는 타자가 아니다.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유한 욕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이런 불행한 균열을 사유한 사람이 라캉이다.
[라캉]
- 타자의 욕망, 혹은 어머니로 대변되는 사회의 욕망은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될 것, 혹은 해야만 할 것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물리력을 동반한 타자의 욕망은 우리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초자아다.
- 타인의 욕망을 수용한 순간 세상과 별다른 갈등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태는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 이러한 억압된 욕망이 억압을 뚫고 주체에게 돌아올 때가 있다.
- 이 억압된 욕망이 주체에 의식될 때,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겁쟁이가 될 것이다. 겁쟁이에게 자신의 삶은 라캉의 말처럼 무의미한 것이 된다.
- 억압된 욕망이 억압에서 풀려났다는 것 자체가 초자아, 혹은 법의 지배가 느슨해졌다는 사실이고, 이 겁쟁이 단계는 자신의 욕망을 되찾기 위한 작은 실마리 이기도 하다.
-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3. 들뢰즈: "욕망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힘이다."
- 라캉은 욕망을 결여와 결핍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 들뢰즈가 중요한 이유는 욕망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 라캉의 욕망 개념에 남아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려고 했다.
- 들뢰즈는 우리가 가진 욕망을 수동적 종합의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 수동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만나는 타자가 우발적인 마주침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
- 종합 = 우발적으로 마주친 타자에 맞게 역동적으로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 들뢰즈에게 우리의 욕망은 새로운 타자와 마주쳐서 그것과 연결하려는 긍정적인 힘,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 관계를 만들려는 생산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어떤 특정한 억압이 일어나면, 새로운 연결 관계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왜곡되어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억압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고정된 주체가 결여 혹은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갓난아이가 젖꼭지와의 연결 관계에서 다른 것과의 연결 관계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내버려 두면, 이 아이의 욕망은 결여나 결핍의 상태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욕망,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을 도모하려는 순수한 힘의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 이처럼 욕망이 결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찾아서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욕망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라캉과 들뢰즈의 차이]
- 결여의 모델: 결여만 충족되면 욕망은 발생할 이유가 없다. 이런 경우 욕망은 결여의 상태에서 충족을 지향하는 일시적인 작용으로 이해될 뿐이다.
- 들뢰즈에게 욕망은 충만으로 사유된다.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 혹은 외부의 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간주된다.
- 결국 욕망은 결여를 느낀 주체가 결여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다. 오히려 들뢰즈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욕망의 좌절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주체는 접촉과 연결을 지향하는 욕망이 방해될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들뢰즈에게 주체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4. 가장 단독적이어야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역설
- 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