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 vs 철학 데리다 vs 들뢰즈

 

유식불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유식불교는 인간의 의식을 여덟 가지 층위로 해부했다. 이것이 바수반두의 팔식에 관한 이론이다.

- 1~5 번째 의식은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이식, 촉감의 의식이다.

- 여섯 번째 의식은 뜻의 의식이다.

- 일곱 번째 의식은 마나스다. 이는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이다.

- 여덟 번째 의식은 알라야식이다. 알라야가 저장을 의미, 비쥬냐나는 의식을 의미한다.

  •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유사한 뜻이다.
  • 인간은 외부와 관계하면서 그 흔적을 간직하게 된다. 그 흔적이 쌓여 심층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알라야식 이라고 한다.
  •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이 부처가 되려면, 알라야식을 끊어야만 한다.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이 현실에서 자유를 구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 유식불교는 눈보다 귀, 귀 보다 코, 코보다 혀, 혀보다 촉감이 우리의 실존적 상태에 밀접히 닿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눈의 세계가 객관적 세계라면 촉감의 세계가 가장 주관적인 세계를 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다섯 가지 감각의 파노라마에서 보이는 세계로 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가, 반대로 감촉의 세계로 가면 갈수록 주관적인 세계가 열린다고 본 것이다.

- 눈 의식의 변화보다는 귀 의식의 변화가, 귀 의식보다는 촉감 의식의 변화가 더 광범위한 주체의 변화를 낳을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무의식적인 심층에 있는 기억 의식, 알라야식의 변화로 가능하다.

 

서양 철학은 보이는 세계에 대한 논의에 집중했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은 들리는 세계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 이르러 보이는 세계를 넘어 들리는 세계마저도 비판적으로 성찰되기 시작한다.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를 진지하게 성찰했던 인물로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와 들뢰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데리다가 시건의 세계보다 심층에 있다는 내면적 소리의 세계를 해체하며 그 이면에 있는 텍스트의 세계를 드러내려고 한다면, 들뢰즈는 소리의 세계를 해체하기보다 소리 자체가 가진 혁명성을 사유하려고 한다.

 

데리다: 내면의 소리는 텍스트에 오염되어 있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이 이성중심주의로 전개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데리다에게 이성중심주의라는 것은 음성 중심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데리다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논평하면서, 정신분석학이 자유 연상이나 혹은 최면 기법으로 발화되는 피 분석자의 생생한 말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정신분석학은 피 분석자의 생생한 말과 피 분석자의 반복되는 말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피 분석자의 생생한 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우선 피 분석자의 녹음된 말이나 피 분석자의 반복되는 말 자체가 먼저 논의 지평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정신분석학이 함축하는 음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한 가지 방법이다. 

- 결국 진실한 말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강조가 의미가 있으려면 녹음된 말은 계속 존재하면서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역설적인 논리인가? 반복되느 ㄴ말이 계속 있어야만 진실한 말도 의미 있게 될 수 있는 것이 말이다.

 

데리다가 음성 중심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순수한 의식 주체를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 의식 주체란 자신의 독백을 듣는 고독한 주체라는 것이다.

- 데리다는 이런 고독한 의식 주체의 순수성을 해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음성 중심주의를 해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 내가 죽는 사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표현조차 사용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 삶과 죽음이 동일한 맥락에서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발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반과 낮, 아래와 위, 안과 바깥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 음성으로 발화된 언어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아무리 순수해 보이는 음성언어 혹은 순수의식도 결국 차이의 체계, 일정한 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배운 언어든 모국에서 배운 언어든 언어를 떠나서 생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텍스트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추상적 사태가 아니라 언어와 생각이 서로 얽혀 들어가는 구체적인 우리 인간의 삶이다.

 

들뢰즈: 외면의 소리는 시각적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다.

데리다는 음성으로 발화된 소리가 가진 의미의 내적 논리를 지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에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층위가 있을 것이다. 들리는 세계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바로 이러한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들뢰즈다.

- 탈영토화는 고정된 지역을 벗어난다는 의미,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가치와 의미를 떠나는 운동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 실재성 = 잠재성 + 현실성

- 어떤 현실적인 대상도 현실적으로 주어진 모습(=현실성) 이외에 앞으로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잠재적인 성격 (=잠재성)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생성되기 위해서는 잠재성의 층위로의 운동이 우선 불가피하다. 이때 탈영토화란 것은 현실성을 떠나서 잠재성의 층위로 복귀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색채와 음을 탈영토화라는 개념으로 구별하려고 했던 이유는

- 모나리자 그림의 색들이 탈영토화 되면 우리는 모나리자를 현실적으로 식별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소리는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것으로 들리는 음악, 혹은 순수한 추상 음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탈영토화가 진행되면 색채의 세계는 용해되어 버리지만, 음의 세계는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음은 들리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정서적 감응을 줄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 이런 추론 끝에 들뢰즈는 보이는 세계보다 들리는 세계가 더 우리의 정서를 자극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서란 지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잠재성의 층위에 더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 색깔 = 현실성, 음악 = 잠재성

 

데리다는 직접적인 내면의 소리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의식이라는 착각은 음성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체하면서 텍스트의 우선성을 강조. 바수 반두와 유사한 결론에 이름. 이에 소리의 세계의 중요성을 비판했다는 반론을 들뢰즈가 주장함.

 

우리의 뇌, 그리고 예술의 힘

- 뇌는 오래된 뇌, 중간 뇌, 새로운 뇌로 구분할 수 있다.

- 중간 뇌는 정서와 감정 기능을 담당한다. 옳다고 판단한 것이 행동으로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 중간 뇌를 거쳐야 한다.

- 한 사람을 특정한 행동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중간 뇌에 자극을 가하는 것이다.

- 정서와 감정 부분을 통과하지 못한 지적인 결론은 행동까지 이르지 않는다.

- 추상적 사유는 정서적 분위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행동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추상적 사유는 시간이 지나면 정서로, 최종적으로는 행동으로까지 침전될 수 있다.

- 중간 뇌를 자극하는 작품 = 고전적 반열에 올라간 사상가는 과학자의 작품, 예술.

- 자본과 국가는 정서적 자극이 새로운 뇌를 자극하는 걸 극히 꺼린다.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 개개인들은 자본과 국가의 억압에 저항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예술다운 예술은 사유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동시에 촉발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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